설교요약
행복을 위하여
새해 첫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스스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너무너무 행복해하신 것은, 우리가 누릴 행복을 내다보셨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첫째도 행복한 삶이요, 둘째도 셋째도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평안과 행복과 감사와 축복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먼저 “예수님은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하는 생각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바울의 말을 들어보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가 기쁨과 기도와 감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고요?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우리’를 향하신 뜻이고요.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할렐루야!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
그러므로 주님의 희생에 대하여 죄스러운 마음을 갖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하는 교만입니다. 나의 의로움으로 십자가를 대신하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이른바 ‘번영신학’이나 ‘기복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시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소망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
새해를 맞아 UN은 앞으로 15년간 온 세계가 협력해야 할 과제로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경제를 모든 것의 최우선 가치로 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겁니다. 사람들은 돈이 된다면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을 일삼았습니다. 경제만 일으키면 복지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지요. 이런 씁쓸한 결과를 받아든 UN이, 인류가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만이 아니라 복지와 환경이 균형을 이루며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뒤늦게 찾아온 이런 깨달음이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등 결코 경제적 가치로 평가할 수 없는 것들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목적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 행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며 대적하였습니다. 그 정점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지요. 스스로를 ‘신의 현현’이라고 선언하였던 안티오쿠스 4세가 성전을 더럽힐 때 목숨을 걸고 저항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서 율법을 가르치거나 지키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자 ‘구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을 ‘할라카’라고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베어 먹은 것을 두고 율법을 어겼다며 공격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율법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할라카를 거부하신 겁니다. 율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주신 것인데, 사람이 마치 율법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주현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의 키워드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말씀을 주신 것도 그리고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오직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속가능한 행복의 원천이요, 지혜의 샘이랍니다. 이 깨달음으로 십자가에서 부활로, 죄의식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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